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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그림자 밟기

 

 

브랜든이 죽었다.

 

슬픈 소식은 그 누구도 준비되지 못한 때에 갑작스럽게 침범해 온다. 그 옛날 자신이 브랜든을 떠났던 것처럼.

 

**

 

 그 날 아침 라르곤은 로드와 뮤에 의해 이 곳 아발론으로 돌아오게 된 후 매일 그랬던 것 처럼 자신보다 늘 먼저 일어나 있는 브랜든에게 입을 맞추고 언제나 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 식사를 차리고 집을 나서는 브랜든을 현관 앞에서 불러 한 번 안아줬을 뿐이다.

 그 소식은 점심시간을 조금 넘긴 많이 늦지 않은 오후에 방문하였다. 예정되지 않은 손님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본 라르곤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표정을 한 로드와 뮤, 그리고 그 뒤의 기사들 몇 명의 얼굴을 본 순간 내용을 알기도 전에 심장이 내려 앉는 기분이 들었다. 듣지 않아도 그들의 표정에서 무언가 브랜든에 관한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리라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브랜든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말을 꺼내기 어려워 하는 로드 대신 함께 둘러 앉은 요한이 말을 했다. 라르곤은 그것이 사실임을 알려 주는 무거운 공기를 무시하고 웃었다.

 "네? 설마요 브랜든은 불멸자…."

 "정말이야…."

 라르곤의 말을 가로막듯 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전에 브랜든도 스스로 자조하듯 말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불멸성은 불사와는 관계가 없노라. 브랜든은 그럼 죽을 수도 있는데 불멸이라는 거야?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게 된거야? 죽어본 적이라도 있어? 그렇게 되면 브랜든은 불멸이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뭐야 어려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 예전 브랜든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삼켰던 수많은 질문들이 라르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복잡한 표정을 지었던 걸까. 뮤가 대답이라도 해주듯 말을 이었다.

 "개체 브랜든은 소멸했어. 오늘 우리 모두가 함께 있었던 오벨리스크 안 오후 2시 정각에. 브랜든은 불멸자 였는데도 소멸하게 된 이유를 우리 모두도 찾고 있어. 하지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서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는 않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니요!"

 라르곤은 거의 소리치듯 한 목소리로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옆에 앉은 미하일이 진정시키듯 라르곤을 다시 앉혔다. 그리고 늘 그런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말 그대로입니다. 브랜든 님은 영혼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존재 자체가 소멸해 버린 상태입니다."

 라르곤이 떨리는 손을 주먹 쥐어 잡는 것을 못본 척 한 채 미하일은 해야 할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이유에 대해서는 저희도 확실히 알지는 못하지만 오벨리스크에 가상 영상체가 아닌 실제 미확인의 환상체가 들어왔고 그것이 사용한 저주에 가까운 마력의 파장으로 인한 것이라고 그렇게 추측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말 끝에 작은 물체 하나를 품에서 꺼내 라르곤에게 건넸다. 브랜든님이 유일하게 남기신 것입니다. 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건…."

 그제까지 사람들이 여럿이서 자기를 놀리는 것만 같아 실감을 하지 못하던 라르곤을 그 것을 보고서야 브랜든이 세상에서 사라졌음을 실감했다. 아름다운 빛으로 빛나는 그 것은 언제나 브랜든의 크라바트 위에 달려 있던 보석이었다. 라르곤은 울지도 못하고 웃는 것도 아닌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의 존재 때문에 라르곤이 슬픔을 드러내는 것조차 힘들어 함을 짐작한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일어났다.

 "무언가 알게 된다면 다시 들를게…. 일단은 조금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로드가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라르곤은 나가려는 로드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브랜든을 다시 불러올 수는 없나요? 저를 여기에 부르신 것 처럼요."

 라르곤의 간절한 말에 로드는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힘들거야…. 뮤는 어딘가에 있는 존재를 소환하는 것만 가능해. 뮤의 유니버스로도 브랜든의 존재는 시간선을 넘어 다른 어떤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해…."

 절망적인 대답에 라르곤은 제대로 슬퍼하지도 못하고 흘러내리려 하는 눈물을 막아 보고자 바보처럼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았지만 가득 고인 눈물 한 줄기가 뺨까지 떨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한쪽 눈으로만 울고 있는 라르곤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무어라 변명을 한 건지도 모르게 로드 일행은 서둘러 그를 혼자 남겨두고 그 곳을 떠났다.

 그들의 기척이 모두 사라지고 난 후에야 라르곤은 웃지 않고 오롯이 울었다.

**

 그렇게 사나흘을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대로 주저 앉아 울었던 것 같다. 식사를 하는 것도 무언가를 하는 것도 모두 잊은 라르곤은 하루 종일 울다가 지치면 잠에 들고 잠에서 깨어나 브랜든의 부재를 깨닫고 부터 혹은 꿈에서 자신을 떠나가는 브랜든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울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브랜든의 모습은 기억하려 할 수록 희미해져 종래에는 브랜든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던가 하는 것조차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면 그 다음에는 브랜든의 목소리가, 또 하루가 지나면 품 안에 들어오던 브랜든의 작은 품이 주던 온기가 어떤 느낌이었던 건지. 매일 그렇게 라르곤은 브랜든의 흔적을 하나씩 잃어버렸다.

 그런 그를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브란두흐였다. 다들 그대를 찾아가지 말라 해 아무도 가지 않는 걸로 알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라는 말을 변명삼아.

 집 안으로 브랜든과 똑같은 붉은 눈동자의 그가 들어오자 라르곤은 반쯤 이성을 잃은 채 울며 그에게 안겼다. 브란두흐도 별 말을 하지 않고 그냥 그가 진정할 때까지 그대로 그를 안고 있었다.

 한참을 울고 울음이 조금 잦아들 쯤에야 라르곤은 자신이 브란두흐에게 큰 실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브랜든과 본질적으로 같은 이라고는 하나 엄밀히 말해 외형 외에는 다른 인생을 살아온 다른 개체, 다른 사람이었으므로 마치 그를 브랜든의 대용품 마냥 이용하는 것은 브란두흐에게 큰 실례였다. 사과의 말을 해야만 했다고 생각한 라르곤이 울음을 그친 고개를 그의 품에서 들자 브란두흐는 괜찮다는 듯이 라르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사과 할 필요없다. 이런 위로야 말로 그를 닮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 온 것이니."

 위로의 말을 건네는 브란두흐의 붉은 눈동자에서 조차 브랜든을 찾는 자신이 라르곤은 싫었다. 자신이 이렇게나 이기적이었던가.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브란두흐가 다시 라르곤을 자신의 품에 기대게 하였으므로 한참을 울어 기운이 빠진 라르곤은 무력하게 그의 품 안에 기대 안겨 있었다.

 "그가 남긴 물건은 없는가? 그것이라면 단서가 될 것 같은데…."

 브란두흐의 물음에 몇 날 며칠을 손에 쥐고 울었던 브랜든의 옷 장식을 그에게 내밀었다.

 "아아, 이것인가."

 브란두흐는 마치 그것을 잘 안다는 듯이 받아들었다. 탁기가 심하게 고여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유년기의 왕자 시절 어머니가 준 것이라 했다. 언제 자라서 아버지 같은 왕이 되냐는 물음에 웃으며 달아 주셨던 것인데 이미 성인을 모습을 한 브란두흐 자신은 떠나온 성의 어딘가에 그것을 두고 왔을 것이라 추억하였다. 그러면서 그가 그것을 쥐고 벽에 세게 집어던졌다.

 "무… 무슨…!!"

 화들짝 놀란 라르곤이 장식을 집어던진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부서졌는지 여부를 알 수 없는 그것을 먼저 집어 든 것은 브란두흐의 큰 손이었다.

 "예상대로 동일하군."

 브란두흐는 제 손안의 그 것을 라르곤에게 보여주었다. 언뜻 보기에는 보석이 조각나 분리 된 것처럼 보이는 장식은 마치 로커 목걸이처럼 안에 시계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석 브로치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것은 시계다. 언제 어른이 되냐고 물어보는 나에게 어머니가 어른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을 재는 시계를 달아 주신 거였지."

 라르곤이 들여다 본 그것은 일반적인 시계와는 다르게 침들이 바쁘게 돌아가고는 있었지만 그것들이 가리키는 숫자가 없었다.

 

 "너무 오래전에 본 것이라 기억이 희미하지만 짐이 왕위에 오르고 성년이 되던 날에는 바늘이 이곳 위로 와서 멈추었지. 그리고 그때부터는 영원히 이 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계를 들여다 보는 라르곤의 머리를 감싸듯 감아 제 품으로 안으며 브란두흐가 말했다.

 "어쩌면 그는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 놀란 라르곤이 품을 벗어나 그의 눈을 껌뻑이며 바라보았다. 그러자 브란두흐가 브랜든을 닮았지만 훨씬 마디가 굵고 긴 손가락으로 우아하게 시계를 가리켰다.

 "이 시계의 침, 지금 움직이고 있지 않나. 주인이 정말 다른 사람들 말처럼 소멸한 것이라면 멈추었겠지."

 라르곤이 다급하게 무례함도 모르고 브란두흐의 옷깃을 붙잡았다. 거의 소리치듯 그 말이 사실이냐고 그럼 브랜든은 어디에 있냐고 외쳤다. 브란두흐는 그런 그를 이해한다는 듯 여전히 온화하게 대답했다.

 "글쎄… 변수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짐이 알 수 있는 건 이 시계가 아직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상하군. 그자는 불멸성을 띄기 전에 이미 이 시계가 멈추어 있었을 터인데… 왜 다시 움직이게 된 것인지 부터가 의문이군."

 브란두흐의 말들을 라르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브랜든이 아직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근거조차 미미한 그런 희망이 거짓말일지라도 붙잡고 싶었다. 자신이 사라진 뒤 자신의 영혼 조각을 붙잡고 그것을 50년이나 간직했던 브랜든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브란두흐는 시계 침이 돌아가고 있는 장식을 라르곤의 손에 건네며 말했다.

 "이 것을 잘 보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미미하지만 그자의 영혼이 느껴지는군. 물론 알겠지만 짐이나 그자의 영혼은 산 자의 그것도 죽은 자의 그것조차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는 죽는다 해도 윤회를 할 수 없으니 죽어있는 상태조차 아닐테지만. 그자의 영혼의 흔적은 그를 찾아내는데 큰 단서가 될 수 있을테지."

 해가 지기 전 라르곤의 집을 나서려 일어나며 브란두흐는 라르곤을 한번 더 품에 안아 다독이며 말했다.

 "도와주고 싶지만 그를 불러 되찾는 것은 그자의 영혼이 누구보다 돌아오기를 바라고 그자를 간절히 원하는 이가 아니면 방법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결국에는 정령사 그대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기도 하지."

 라르곤의 감사 인사에 그는 수줍게 한마디를 덧붙이고 떠났다.

 "그자를 찾는 것을 도와 줄 수는 없지만. 그자를 대신해 위로가 필요하다면 기댈 곳을 짐이 제공할 수는 있다… 필요하다면…."

그 말의 이유는 말을 꺼낸 그와 들은 라르곤 모두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

 

 라르곤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집을 뛰쳐나가 브랜든을 찾으러 가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어느덧 해가 사라져 저물어왔다. 어두워지는 시야를 불도 밝히지 않은 채 그대로 둘이서 보낸 향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침대 위에 무력하게 털썩 누웠다.

포근한 이불에 둘러싸인 라르곤은 누운 채 손을 뻗어 허공에 말을 걸었다.

 "브랜든, 너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어?"

 그제서야 라르곤은 자신이 브랜든을 떠났던 시간을 떠올렸다. 자신을 한 순간에 잃은 브랜든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네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데. 라르곤은 혼자 중얼거렸다.

 갈 곳을 잃은 눈물 한줄기가 눈가를 따라 흘러내렸다. 그것을 부정하려 라르곤은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데도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브랜든이 죽었다고 생각해버리면 어떡해. 나만은 브랜든을 다시 되찾아 올 수 있다고 믿어야만 해. 그러지 않으면 이제 세상엔 아마 아무도…. 라르곤은 50년 전 영혼 보관함 안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브랜든의 말을 되뇌었다. 내가 포기한다면 더 이상 세상에 그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남지않을 테지.

 아… 그렇구나… 그래서 브랜든은 그렇게 끝까지 영혼 조각을 놓지 않았던 거구나. 의식조차 희미하던 그 곳에서 브랜든 이만 나를 놓아줘 같은 말을 수없이 건네던 날의 브랜든을 이제야 이해하게 하게 되자 라르곤은 다시 만난 날에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통제하지 못하고 끝내는 소리 내어 울었다. 흐느끼는 소리는 감시하는 사람 하나 없음에도 세차졌다 다시 무언가를 의식하듯 줄어들었다가 다시 견디지 못하고 큰 소리가 되었다.

**

 

 울다 지쳐 잠이 들었을까. 잠긴 코를 훌쩍거리며 라르곤은 미처 해가 다 떠오르지 못한 시간에 퉁퉁 부은 창피한 얼굴을 하고서는 길을 나섰다. 짐이라 할 것은 별로 없었다. 손에는 브랜든의 브로치를 들고서 마지막으로 그가 사라진 오벨리스크의 입구로 누군가 만나게 될까 조심스러운 한 마리의 토끼처럼 작은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오벨리스크의 돌 문을 혼자서 어떻게 열 것 인가를 라르곤이 고민하며 걸어가는 동안 입구에는 예상치 못하게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그 손님은 라르곤을 보자 빙긋 웃음을 보였다. 50년 전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도 만나기 어려웠던 상당한 미모의 마도사가 흥미롭다는 듯 라르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나~ 우연인걸. 이쯤 되면 울보 개구리라도 한 번쯤은 나타날 거라 생각했지만?"

 라르곤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반사적으로 몸을 지키려는 듯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것은 아마 자신이 나타나기 전 브랜든을 놀잇감 정도로 갖고 놀았다는 이야기들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브랜든 본인은 그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었기에 모르기도 힘든 일이었다.

 "어머 겁먹은 아기 토끼처럼 저를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답니다. 저는 토끼를 잡아먹는 야생 동물은 아니거든요"

 

 체자렛이 여유 있게 가공된 미소를 지어보였다. 라르곤은 그 것이 아름다우면서도 참으로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딴 생각을 할 여유가 있으려나?"

 

 그는 라르곤을 향해 둥글게 말린 종이 하나를 던졌다.
 

 "작은 선물을 드렸으니 그 값어치 만큼 저를 재미있게 해 주길 기대하죠."

 마도사는 큰 모자를 다시 한번 고쳐 쓰고는 라르곤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렸다. 라르곤은 허리를 숙여 던져 진 낡은 종이를 집어 들고 펴 보았다.

 "이건…?"

 낡은 종이는 굳이 설명이 없어도 금세 지도란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한번도 가본 적 없지만 오벨리스크 안의 지도라는 사실도. 그리고 그 지도 위에는 여러 색의 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도 밖에 붉은 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라르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걸음을 옮겨보았다. 그러자 붉은 점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마 이게 나…?"

 고민할 것도 없이 라르곤이 입구로 다가 갈수록 붉은 점도 지도의 영역으로 점점 다가가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라르곤의 심장 박동이 점점 뛰어왔다. 이거라면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자신도 이 곳에서 잘만하면 마물과 싸우지 않고 브랜든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분주히 움직이는 검은 점들 사이에 브랜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숨이 가빠왔다. 라르곤은 서둘러 오벨리스크의 돌 문을 끙끙거리며 밀어 열었다.

**

 

 라르곤은 지도의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가짜 마물들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짚어보며 한층 씩 오벨리스크를 올라갔다. 오벨리스크는 전투 경험을 쌓으려고 매번 마물과 싸우며 오른 기사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지만 지도처럼 전체적인 구조를 조망한다면 마물들을 만날 수 있는 메인 길과 방들 이외에도 샛길들이 있어서 마물과 부딪히는 것을 피하고 숨는 것이 가능했다. 그것은 제대로 된 건물의 길이라기 보단 마치 보급로 같은 느낌의 좁은 복도에 가까웠지만.

 

라르곤은 그런 좁은 통로를 따라가다 미처 그 사이에 있는 마물의 존재를 지도에서 놓치고 마물의 뒤통수와 부딪히고 말았다.

"아잇쿠!"

 라르곤은 가상의 마물이라 해도 무언가와 싸워 쓰러트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을 향해 돌아보기 전에 재빨리 몸을 틀어 틈으로 숨으려 하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가 하더니 어딘가로 떨어져 버렸다.

**

 한참이나 어딘 가로 떨어지는 감각이 있었지만 바닥이 멀게 느껴져 라르곤은 두려움을 느꼈다. 정령들을 불러도 대답이 들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다행히도 추락하는 감각이 멈추었을 때 라르곤은 어딘가에 떠 있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꽤나 한참 추락했기 때문에 자신의 종착점이 바닥이었다면 몸이 으스러졌겠구나 하는 생각에 라르곤은 몸서리쳤다.

 라르곤은 그제서야 들고 있던 종이 지도를 찾았지만 넘어지면서 어딘가 다른 곳에 놓치고 만 것인지 주위를 더듬어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깨달았지만 라르곤이 서있는, 정확하게는 떠 있는 공간은 일상적이지 못한 기묘한 공간이라는 것을 라르곤은 곧 알아차렸다.

 내가 여기 왜 왔더라…? 갑작스러운 의문에 라르곤은 자신의 머리를 정신 차리라는 듯 두드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브랜든을 찾으러 온 건데 나도 참 이래서야…. 하며 라르곤은 아티팩트를 들어 등불로 앞을 비추며 걸음을 옮겼다. 대지에 닿지 않으면서도 앞으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마치 자신이 브랜든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 곳은 정신 착란 같은 어떤 마력이 미치는 곳인지 라르곤은 자신이 무엇인지. 또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 곳에 있는지를 수없이 되새기며 나아가야만 했다.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면서도 브랜든도 그랬을까. 망각이라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저항하려 브랜든도 자신처럼 끊임없이 자신에게 다짐을 하였을까. 브랜든이 나에게 주었던 사랑이 이런 것이었을까. 라르곤은 브랜든을 닮고 싶어졌다 지금만큼은.

 끝도 방향도 없는 것 같은 이상한 공간을 반나절 넘게 걸었을까. 조금 지친 라르곤이 주저 앉으려 할 때 키가 큰 그림자가 도망치듯 움직이는 것 같은 기척이 느껴져 라르곤이 지친 다리를 다시 일으켰다.

 "브랜든!"

 라르곤은 그림자에게 어떠한 근거도 없는 확신으로 말을 걸었다. 그림자는 듣지 못한 척 외면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라르곤은 뛰어가 그림자의 자락을 간신히 붙잡았다.

 "브랜든 맞아? 아니 너 맞아. 네 영혼을 내가 못 알아볼 리 없어."

 라르곤은 품에 넣어두었던 브랜든의 브로치를 꺼냈다. 시계는 어느새 움직이던 바늘이 멈춰있었다. 라르곤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에 앞서 브랜든을 찾아냈다는 기쁨에 자신이 붙잡은 것이 브랜든의 영혼인지 혹은 환생이거나 다른 어떤 허상인지 조차도 모른 채 그저 조용히 울었다.

 브랜든이라 부른 그 것은 끝내 라르곤을 향해 돌아보지 않았다. 라르곤은 다가가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그것의 등을 끌어안았다.

"브랜든 많이 컸구나? 아니 원래는 브랜든도 이렇게 컸을테지."

 라르곤은 자신을 향해 돌아보려 하지 않는 그것의 등에 흐른 눈물을 적시며 대답 없는 말을 계속 이었다.

 "브랜든, 지금도 난 네가 없인 살 수 없을 것 같아. 네가 이젠 돌아올 수 없다 해도. 혹은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 처럼 한낱 영혼 조각이나 망령이 되었다고 해도 어떤 모습이어도 난 네가 곁에 있었으면 해."

 여전히 그것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라르곤만이 마치 말하지 못하는 그것에게 말을 걸 뿐이었다.

 "좋아하니까… 이대로 보낼 순 없어. 브랜든. 좋아해… "

 "이런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 평소보다 좀 더 힘이 없이 쉬어버린 마치 노인 같은 목소리가 대답을 하자 라르곤은 등을 안고 있던 팔에 좀더 힘을 주어 그를 끌어 당겼다.

 브랜든 맞구나. 등에 뺨을 기댄 라르곤은 브랜든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는 작게 말했다. 사실은 처음에는 잘 된 걸까 생각하기도 했었어. 브랜든 너는 언제나 나도 불멸자가 되게 해주면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을 텐데 하면, 나에게 그런 고통을 지울 수는 없다면서 늘 영원히 산다는 것은 저주라고 했었잖아. 그래서 네가 드디어 그런 고통에서 벗어난 거니까 처음엔 슬프지만 축하해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같은 라르곤의 목소리가 브랜든의 뒤에서 울렸다.

 그제서야 그것이 몸을 돌려 라르곤을 바라본다. 라르곤은 처음 보는 얼굴에 순간 놀랐지만 사랑했던 붉은 눈동자에 안도했다.

 "브랜든, 이런 모습으로는 처음이지만. 이런 모습이구나 어른이 된 브랜든은."

 "흉측하지 않은가?"

 

 낮은 목소리에 라르곤은 고개를 저으며 주름진 그의 뺨을 손을 뻗어 어루만졌다. 외모와 키로만 본다면 흡사 브란두흐라 착각 할 만한 모습이었지만 훨씬 더 노인의 얼굴을 한 그는 익숙한 눈을 하고 라르곤을 바라보았다.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아. 네가 돌아올 수 있다면."

 

 라르곤은 조심스럽게 브랜든의 목에 매달리듯 안겼다. 그러고는 곧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였으므로 브랜든은 등을 쓸어 그를 진정시켜야 했다. 쏟아지는 눈물에 꺽꺽대며 제대로 잇지도 못하는 말로 라르곤은 브랜든… 내가… 훌쩍… 너를 보내주려고… 훌쩍 축하해 주려고 했는데… 이기적 이지만 훌쩍… 그래도… 조금만… 하며 엉망으로 한 마디씩 간신히 하더니 마지막 말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잔뜩 터트리며 조금만 더 내 곁에 있어달라고, 세상에서 가장 못난 얼굴을 하고서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브랜든에게 부탁을 했다. 브랜든은 그런 추태도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라르곤의 머리 위를 조용히 쓰다듬어 주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울음을 터트린 라르곤이 아직도 고르지 못한 숨을 브랜든의 품에서 불규칙하게 쉬는 동안 브랜든이 차분히 말했다.

 "다 울었으면 일단 이곳은 나가는 게 좋을거다. 폐허에서 평범한 인간은 한나절도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다. 지금까지야 강한 의지로 어떻게든 버틴 모양이지만…"

 

 라르곤이 품 안에서 브랜든의 옷을 움켜 쥐었다.

 "나 혼자 나가라고 하는 건 아니지?"

 "라르곤 너는 내 멱살을 쥐는 것을 참 좋아하는군. 처음 나를 끌어내던 날부터."

 "브랜든이 싫다고 해도 매일 찾아 올거니까."

 라르곤이 쥐고 있는 옷과 함께 브랜든을 끌어당겨 점잖은 턱수염 사이 메마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펴 브랜든에게 내밀었다.

 "손, 놓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브랜든의 말투를 흉내 내는 라르곤을 안경 너머로 인자하게 바라보던 브랜든은 그 위에 손을 얹으며 늘 그랬던 것 같은 대답을 건넸다.

 

 "네가 원한다면."

 브랜든을 손을 잡으며 금세 재잘거리는 라르곤을 보며 브랜든은 작게 한숨을 쉬며 진짜 노인 같은 표정을 하고서는 어쩌면 너보다도 내가 먼저 숨을 다할지도 모르겠군. 하고 푸념을 했다. 그러자 라르곤은 뭐 어때 어차피 나도 원래는 노인이잖아? 이번에는 네 마지막을 내가 거두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같은 말을 하며 웃으며 일그러진 공간 밖으로 브랜든과 처음 보내보는 새로운 생활을 향해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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