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별 그림자 밟기 - 후일담 ~할아버지와의 동거~
"라르곤, 나는 네 조부가 아니다."
"에이, 브랜든 그러지 말고 아 해봐. 놈팽이 버섯이 몸에 얼마나 좋은데."
라르곤이에요. 브랜든이 집에 돌아오고도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브란두흐 전하는 브랜든을 보고는 내가 보지 못한 노년의 모습이란 이런가 하고 한참이나 감탄을 했구요. 미리안드 님은 흥미로운 실험체가 업그레이드를 했다고 감탄했다가 브랜든이 잔뜩 호통을 치는 바람에 제가 그러다 혈압 오른다고 말리다가 혼이 났지 뭐에요. 체자렛님은 제 기대를 져버리지 않으시네요 하면서 방긋 웃으셨는데 이건 좋은걸까요? 그러고 보니 지도를 주셨던 감사 인사를 아직 하지 못했네요.
거기다 브랜든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벌써 사르디나 까지 났는지 외교 사절로 왔던 로잔나 님은 브랜든을 보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흠흠 네 놈이 그런 꼴을 하니 나보다 연상이라고 뻐기던 꼴이 제법 그럴 듯 하구나. 내용물은 여전히 어린 놈 같지만 말이다! 라고 하셨고 헬가 님은 브랜든에게 너도 노인 클럽에 들어올래? 라고 했어요 브랜든은 단번에 거절했지만요. 그 밖에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브랜든이 드디어 불멸을 끝낼 수 있게 된 걸 축하했어요. 브란두흐 님만이 조금 씁쓸해 했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다른 자신이 이루게 된 것에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어요.
브랜든의 상태는 그렇게 노화가 많이 진행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건강을 지키는 건 약제사의 일이니까 제가 힘내고 있어요! 노인을 돌보는 일이라면 자신있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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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 해도 노인에게 좋다는 놈팽이 버섯 수프를 끓여서 브랜든의 어깨를 주물러 주고 수프를 먹이려고 했는데요 브랜든이 거절하지 뭐예요. 브랜든은 전에는 친구처럼 대하더니 내 모습이 노인이라고 해서 태도가 변하다니. 하며 서운해 하네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노인의 모습이니까 더 정성 들여 대하게 되는 것은 사실인걸요.
"라르곤, 언제까지 나를 그렇게 부모처럼 대할 생각이지?"
브랜든이 식사를 마친 후에 차분하게 말했어요. 와오, 이거 아무래도 저희 싸우게 될 것 같죠?
"부모라니. 그런 거 아니야 브랜든."
제가 대답했지만 브랜든은 결심했는지 석연찮은 표정이에요.
"내가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부터 효도라도 하듯 극진하게 대하고 있지 않나. 라르곤, 결국 너도 외모에 좌우되는 자 였나."
브랜든이 먼저 공격을 하네요. 찔리는 게 전혀 없지는 않아서 제때 반박을 하지 못했더니 브랜든이 계속했어요.
"아니면 역시 예전에는 작고 귀엽다 하였는데, 이제는 초라한 노인의 모습이라 정중함을 가장해 거리를 두고 싶은겐가?"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브랜든!"
브랜든은 생각보다 더 많이 서운했던 모양이에요. 물론 제가 작고 귀엽던 브랜든이 동생 같은 느낌이라 자주 귀엽다고 했긴 하지만. 브랜든은 저에게 귀엽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걸까요?
"브랜든은 음…. 지금도 귀여운걸? 아기같이 동글동글한 모습은 아니지만 지금은 콧수염도 귀엽고 매일 아침 머리를 땋는 것도 귀엽…"
"라르곤, 네가 계속 그렇게 나를 공경하는 효자처럼 대한다면 너한테 더 이상 아침마다 입을 맞춰주지 않겠다. 부모나 조부와 연인이 될 수는 없지 않나!"
브랜든이 선언했어요.
"어, 근데 브랜든 우리 연인이야?"
"라르곤! 하아…. "
어라? 물어보면 안 되는 질문이었나 봐요. 그 날부터 브랜든은 단단히 삐지고 말았는지 필요한 말 이외에는 말을 안하네요…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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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째, 식사 시간조차 숟가락 소리만 들리는 게 견딜 수가 없어서 저는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고 말았어요.
"브랜든 정말! 계속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그러니까 우리 관계가 그…!"
하지만 제 도발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어요. 브랜든이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거든요. 간신히 들릴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브랜든이 말했어요.
"미안하다, 라르곤. 내가 용기를 내지 못해서 네게 헷갈리게 했구나…. 다 내 잘못이다."
브랜든은 꽤나 복잡한 표정이었어요.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좋을까요. 저희 사이가 대체 무엇인지… 그러니까 브랜든과 저는 좋은 친구 사이라 믿었는데 아닌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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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든 만큼이나 마음이 복잡해 진 저는 누구에게 물어봐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그래도 브랜든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것 같은 브란두흐 님을 찾아갔어요.
브랜든과 둘 사이의 일을 남에게 말하는 것은 조금 망설여졌지만 슬프게 울던 브랜든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냥 둘 수가 없었어요. 며칠 전의 일을 차분히 들어 준 브란두흐 님은 큰 한숨을 쉬었어요.
"그런… 어리석은."
"헤헤, 제가 좀 바보 같기는 해요."
"아니 짐이 말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 자를 말한 것이다."
브란두흐 님이 브랜든 욕을 하는 걸까요? 제 표정을 이상한 걸 알아차린 브란두흐 님은 변명이라도 하듯 설명을 해주었어요.
"그 자에게 질투 같은 걸 하거나 비난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것 같아 너무도 내 자신 다워서 한심하다 한 것뿐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과는 딴판이었던 모양이군. 짐은 그대들이 사이가 좋아 혼인이라도 하였나 하였거늘."
"네? 혼인이요? 헤헤 그런 건 아니에요 저희가 제가 돌아온 이후에 같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요."
어라 제가 왜 당황해서 변명 같은 걸 했을까요? 갑자기 조금 더운 것 같기도 하고… 앗,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브란두흐 님은 브랜든의 마음을 알 것 같다니 정말 본인이어서 이해하는 걸까요?
"그런데 무슨 생각인 걸까요? 브랜든은…"
조금 심각한 질문에 브란두흐 님은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어요.
"그것을 짐이 설명해서 알게 되는 것은 부당하지 않겠는가. 그 자에게 진심을 직접 듣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 테니."
그러니 더 궁금해서 곤란해졌어요. 다만 브란두흐 님은 힌트처럼 제게 이런 말을 해 주었어요. 그 자와 정령사 네 차이점이 뭔지 생각해 본다면 답이 나오겠지. 아니면 내게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짐은 그런 하찮은 고민으로 정령사 네 입장을 애매한 위치로 남겨두지 않을 테니. 라면서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와 제 어깨에 손을 얹어 주시지 뭐예요. 왠지 안심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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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생각해 봤어요. 브랜든과 나의 차이점은 뭘까. 그리고 브랜든의 태도는 왜 변해 버린걸까. 집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서 있는 브랜든이 보이네요.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브랜든은 떠있지 않고 대지 위에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겠죠.
다짜고짜 브랜든의 손목을 끌고 집으로 들어와 현관문을 닫았어요. 의자에 거의 정좌하듯 앉은 브랜든을 추궁하듯 말을 꺼냈어요.
"브랜든,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있었지만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나는 네가 아니니까 네 마음을 알 수 없어. 그러니까…"
브랜든은 마치 잘못을 반성하는 아이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그래, 라르곤. 이제는 말을 해야겠지. 처음에는 내 자신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금방 떠나버려 빈자리가 되어버릴 너의 존재가."
"그래서 나에게 아무 이름도 붙여 주지 않았는데 내가 떠나고도 괜찮지 않았던 거지, 브랜든은?"
"그렇다. 애초에 그런 애매한 관계로 둔다고 해도 내 마음이 괜찮지 않을 것이란 건 이미 50년 전에 네가 떠나기 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이번에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필멸자에게 불멸자가 가장 소중한 사람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물러나 있었던 거고? 브랜든은 정말 자기 멋대로네. 그런데 이번에는 왜 또 나한테 말을 못할만한 새로운 이유가 생긴 건데? 말해봐."
처음에는 브랜든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꺼낸 말들 이었는데 아뿔싸. 말을 하다 보니 북받쳐서 저도 모르게 쏘아붙이게 되었어요. 그치만요 조금은 화도 났어요. 바보 같은 브랜든.
"이제… 나는 너를 한참 먼저 떠날 자이지 않나. 라르곤 너는 아직 젊은 신체를 가지고 돌아왔으니 좀 더 오래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떠날 자의 마음 같은 것은 쓸모없는 짐이 될 뿐이다."
"쓸모없지 않아! 브랜든은 바보야! 브랜든은 맨날 그랬어! 나한테는 한 번도 말해주지 않고 매번 제멋대로 모든 걸 결정하잖아. 이곳에 돌아왔을 때에도 화를 내지 않았는데 오늘은 좀 화를 내야 할 것 같아. 브랜든 나 네가 내가 없는 동안 어디서 뭘 했던 건지 다 알아! 너어 정말!“
브랜든의 얼굴이 곧 울듯이 일그러졌어요. 하지만 저는 정말 화가 많이 났어요.
"바보 브랜든! 나한테 가지 말라고.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한마디만 해주지 그랬어. 매번 혼자만 도망치고 혼자서만 결정하고! "
브랜든은 마치 강아지가 주인에게 달려들듯 저를 끌어당겨 와락 끌어안았어요.
"그건 라르곤 너도 똑같지 않나. 너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고 떠난 것부터."
브랜든의 쓸쓸한 말에 저는 더 화를 낼 수 없었어요. 그것은 사실이었고. 브랜든이 제가 없는 동안 했던 일들이 옳은 일들이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까지 저를 그리워하는 브랜든의 마음이 기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정말 원한 것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어요.
"바보같은 브랜든…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리고 나도 브랜든에게… 사랑한다는 말… 듣고 싶었는데."
그런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단 것처럼 브랜든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어요. 노인이 되어도 저 놀란 동그란 눈은 어린 몸일 때랑 똑같네요.
"언젠가 그래, 네 말처럼 브랜든이 나를 떠나는 날도 오겠지. 그래도 브랜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준다면 그 기억으로 오랫동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오히려 네게 족쇄가 될 것이다."
브랜든은 여전히 단호하게 말했어요. 하지만 저도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 브랜든에게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다면 많이 슬플 것 같아."
**
브랜든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한참을 더 고민했어요. 저를 위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저를 슬프게 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거겠죠.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안고 있는 시간은 먹먹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어요.
"…미안하다…. 그리고 많이 사랑… 한다 라르곤."
그 말을 겨우 하고는 브랜든은 한참을 굵은 눈물 줄기를 떨구었기 때문에 달래주어야만 했어요. 미안함도 그동안 참아온 것들도 섞인 눈물이 그치면 저희는 연인이 될까요?
그러고도 브랜든과 보내는 생활은 별로 변하지 않았어요. 저는 여전히 라르곤 에스테리아인 채로 노인이 된 브랜든과 함께 살고 있어요. 누군가는 결혼식을 하는 것은 어떤가 물어왔지만 저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아래로 손만 조용히 잡고 있었어요.
브랜든을 되찾아 오고도 벌써 두 계절은 변했고 바깥의 풍경이 변할 동안 조금 달라진 건 제가 브랜든한테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면서 뜸을 들이면 겨우 사랑한다고 말해주던 브랜든이 그렇게 물어보지 않아도 가끔씩 먼저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를 굳이 집에서도 확인을 하고서는 끌어안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해 준다는 것 정도일까요?
언젠가는 끝나는 날이 온다 해도 저는 이런 평화로운 생활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브랜든이 버섯 수프를 양파 수프만큼 좋아해 준다면 더 기쁠 것 같지만요. 그 외에는 좀 더 브랜든이 오래 제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는 정도일까,
여러분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