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랜든 카스에게 아발론의 로드는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심문의 특징이 일부 포함된) 이런저런 상담 후에 어쩌면 데려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라르곤의 초상화를 받아 간 그 녀석은, 오십 년 동안 갈루스 제국이 쥐고 있던 브랜든의 목줄을 고작 몇 주 만에 끊어냈다.
라르곤 에스테리아가 돌아왔다. 브랜든의 시간 속에서 악인으로서의 복잡한 재판과 속죄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도중의 일이었다. 세계의 흐름에 휩쓸려 기묘한 낙원에 떨어진 브랜든은 여전히 무저갱을 맴돌고 있었다는 말이다.
아발론 소속이 되었다고 해도 남은 책임은 줄어들지 않고 그저 이관될 뿐이었다. 브랜든은 반정기적으로 출장과 유배 사이 어디쯤에 걸쳐 있는 파견을 떠나야 했다. 대부분은 과오를 증명하는 재판에의 출석이었고, 나머지는 남은 책임의 이행이었다.
여전히 ‘제국 8 검 브랜든 카스’의 집무실에 편지와 서류, 가끔은 돌멩이나 (대부분 분노에 휩싸인)사람들이 그를 찾아왔으므로. 갈루스 제국과 피해를 본 국가들 사이의 긴 싸움이 마침내 열매를 맺어 제국의 비인도적/침략적 행위의 중심이 되는 건축물들을 철거하는 협의안이 확정된 직후, 집무실을 정리하러 갈루스를 찾았던 날이 브랜든 카스의 마지막 갈루스 공식 방문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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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들어진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진 짙은 색 목재 문에는 못 보던 낙서와 흠집이 늘어나 있었다. 여러 겹 겹쳐서 제대로 읽어낼 수도 없게 된 글자 뭉치로 덮인 문 앞에 선 것은 둘이었다. 무슨 말인지 읽을 수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빤히 문을 바라보다 문득 자신을 따라 그 글자를 읽으려 노력하는 라르곤을 곁눈질한 브랜든이 얕게 한숨을 쉬었다. 자세히 보려고 하지 마라, 네 것이 아니다- 한 마디 건네고는 높은 문을 익숙하게 밀어 열었다.
집무실 안은 깔끔했던 시절의 흔적이 거의 사라진 채였다. 깨진 유리조각과 누구의 것일지 모를 옅은 혈흔이 내팽개쳐진 책더미 위로 드문드문 흩뿌려져 있었고, 그을음이 낀 책상 너머로 아래쪽이 깨진 창유리가 찬바람을 들여보내고 있었다. 명백히 남은 악의와 멸시의 흔적들.
문 앞에서 멍하니 굳은 라르곤을 그저 그렇게 두고, 브랜든은 아주 익숙하게 왕좌에서 내려서서 -여전히 공중에 떠 있었으니 엄밀히 따지면 ‘내려선’ 것은 아니겠지만 - 불러낸 망령의 손으로 바닥을 쓸어냈다. 그래도 잠시 후 카펫을 밟고 들어선 라르곤의 발아래에서는 자각대며 유리 조각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너를 되찾겠다는 핑계로 아주 유능하게 악했다, 라르곤.”
다른 놈들과 비교해봐도 죄가 가볍진 않을 테지, 자책에 가까운 고백과 함께 어깨 너머로 라르곤에게 띄워 보낸 작은 뭉치는 제국군 고위급에게 지급되던 순간 이동 스크롤이었다.
“적당히 개조해 뒀으니 원하는 곳을 말하며 찢으면 된다.”
그러고는 기억도 나지 않는 누군가에게 도망칠 기회를 줬던 언젠가처럼 태연히, 책상 위의 서류를 주워들어 읽기 시작한다.
“내게는 더 이상 필요 없으니 마음대로 써라.”
버석하게 마른 그 목소리에 사실 후련함이 담겨 있었다고, 브랜든은 스스로를 오해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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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이게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저 안온한 일상을 만끽하고만 싶었다. 수십 년을 지나 겨우 되찾은 빛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싶지 않았다. 나서서 말하지 않는다 해도 라르곤은 자신이 주위를 맴도는 것을 언제까지고 받아들여줄 테였다.
그리고 그렇기에, 라르곤에게는 모든 것을 알고 나서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지금의 브랜든 카스는 그러한 안식을 얻을 자격이 없었으니까.
그러므로 브랜든은 라르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같이 가도 돼? 썩 좋은 광경은 아닐 텐데. 그래도 알고 싶은데. 안 될까? 원하는 대로 해라. 그정도로 품을 팔 가치는 없겠지만, 직접 보는 편이 마음을 정하기 쉬울지도 모르겠군.
너에게도,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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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라르곤이 기대했던 대로의 광경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며칠 전 대화의 의미를 이제야 파악한 라르곤의 머릿속은 그 자신도 해석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음울하게 다채로웠다. 동정이나 분노같이 이해하기 쉬운 것들이 조금이라도 섞여있었다면 이렇게나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르곤은 여전히, 어쩌면 당연하게도, 브랜든의 편이었다.
“오늘 짐 정리도 다 해야 하는 거지. 이 책들은 다 챙겨 갈 거야?”
브랜든은 여전히 되돌아보지 않은 채, 대꾸한다.
“대부분 버릴 생각이다.”
받아 든 스크롤을 품에 넣고 책장으로 두어 걸음 걸으면, 발밑에서 유리 조각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도와줄게. 따로 빼놓을 거 있어?”
브랜든은 잠시 침묵하다, 조금 메인 목으로 답을 건넨다.
“그쪽 책장은 전부 폐기할 책들 뿐이다.”
“어디 모아놓거나 해야 하나?”
하고 싶은 말을 아주 많이 줄여서 짧은 문장에 숨기듯 눌러 담으면 놀라울 정도로 건조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라르곤은 방금 처음으로 깨달았다.
“딱히 분류할 거 없으면 내가 옮겨 놓을게.”
스스로에게도 낯설 만큼 차분히 말을 이으면, 브랜든은 다시 잠시 조용하다.
“그냥 바닥에 두기만 하면 돼. 한 번에 모아서 폐기장까지 옮겨 태울 셈이었다.”
라르곤은 브랜든의 작은 손끝을 따르는 거대한 망령의 손을 생각한다. 그의 저주였고, 힘이었고, 이제는 죄의 증명이 되어버린 그 손을 생각한다. 그 손과 원천을 공유하는 어떠한 힘으로 공중을 부유하는 브랜든을 생각한다. 떠 있는 것? 글쎄.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지. 언제였던가, 제국의 기차에서 쓰게 웃으며 밋밋한 회색빛 후드를 깊게 눌러쓰던 그의 표정을 생각한다.
“…이쪽의 책장 세 개에는 유리 파편이 있을 수 있으니 건드리지 말고.”
그렇구나, 작게 뱉고, 라르곤은 과장된 몸짓으로 소매를 걷었다. 브랜든은 여전히 뒤돌아 있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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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공학과 마법이 담긴 양장본으로 가득했던 첫 번째 책장이 텅 빌 때쯤 되어서는, 라르곤은 다음 책장으로 다가가는 그 몇 걸음 동안 내려놓은 책들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두 번째 책장에 꽂힌 것은 브랜든이 쓴 기록들이었다.
책등에 정갈한 필기체로 쓰인 단어 중 눈에 띄는 것은 영혼, 윤회, 빙의. 어떤 맥락으로 묶인 단어들인지 쉽게 알아챈 라르곤이 쓰게 웃었다. 돌아본 브랜든은 아주 두껍게 묶인 서류철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작은 노트에 무언가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있지, 브랜든. 이거 조금만 읽어봐도 돼?”
브랜든은 손을 잠시 멈췄다 다시 태연하게 답한다.
“당연히.”
손이 가는대로 들어올린 것은 여러 권 모여 꽂혀 있는 검고 얇은 공책들 중 하나였다. 표지에 제국의 인장이 선명히 찍힌, 아마도 제국 8 검으로서의 기록. 그 안에서 라르곤은 수없이 많은, 낯선 것들을 읽어 낸다.
- 저항군에게 동조하는 대중: 여론 악화 중. 개입 필요.
- 게릴라전 대비 훈련 성료.
- 대상자 중 42인 사망 확인. 6인 확인 불가. 작전 재구성 지시.
날카로운 필체로 쓰인 그 글씨가 괜히 낯설어서 손끝으로 쓸어 봐도, 잉크의 흔적이 남은 부분은 빈 종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감촉을 돌려줄 뿐이었다. 가볍게 써 내린 글씨가 이런 흔적을 가지기 마련인데.
그 사실이 괜히 더 생경해서 종이를 다시금 매만져도 이미 고정된 과거는 한 획도 흐려지지 않았다. 깔끔하고 가독성 좋게 ‘영혼 포식자’의 행보와 판단과 그 결과가 그저 그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팔락 팔락 소리를 내며 몇 장을 넘겨도 빈 페이지는 없었다. 그런 노트가 줄지어 꽂혀 있는 곳이 다름 아닌 그의 책장이라는 게, 마땅한 방향도 없이 원망스러웠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라르곤이 읽고 있는 공책을 본 브랜든이 허, 하고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그 작은 소리에도 놀란 라르곤이 공책을 탁 덮었다.
“아, 그, 미안, 이런 내용일 줄은….”
저도 모르게 변명을 웅얼거리는 라르곤이 공책을 빼냈던 자리에 다시 꽂으려 허둥대면,
“아니다, 라르곤. 읽지 말라는 게 아니고,”
그래, 읽지 말라는 말이 아냐. 작게 중얼거리고 한숨을 내뱉은 브랜든이 조금은 갈라진 목소리를 이어간다.
“표지에 제국 인장이 있는 기록물들은 증거가 될 수 있으니 모아둬야 한다는 말을, 안 한 것 같아서.”
아, 어, 그렇구나. 그럼… 이쪽에 모아서 꽂아 둘게. 어물어물 대답하고 꽂던 공책을 마저 꽂으면, 다시 침묵이 흐른다. 브랜든은 다시 서류에 눈을 고정했다가, 참았던 숨을 뱉듯 조금 급하게, 문장을 붙인다.
“뭐든 읽고 싶은 만큼 읽고, 물어보고 싶은 만큼 물어, 라르곤. 그러다 내가 다르게 보인다면, 그저 그렇게 봐라.”
라르곤이 그를 돌아봐도, 말을 고르는 브랜든은 눈을 마주쳐 오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하려 노력하지 마. 그래 줬으면 한다. 그 누구보다도 그럴 자격이 있는 게 너니까.”
떨림을 다 숨기지 못한 목소리가 끝나면, 다시 팔락이며 서류 넘기는 소리가 이어진다. 라르곤은 조심스레, 방금 다시 꽂아 넣은 것의 바로 옆 공책을 꺼내 읽는다. 여전히 무겁고 어둡고 돌이킬 수 없는 나날들이 눈앞에 펼쳐져도, 꿋꿋이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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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여다본 시간들은 너무나도 무겁고, 아득하고, 어두웠다. 앞으로도 제법 오래 유지될 밑바닥도 없는 지옥을 만들어낸 과거의 기록은 광택도 없이 말라붙은 잉크의 색이었다. 그것은 분명 온전히 브랜든의 것이다. 도망칠수도, 누군가 대신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곳에 옅은 빛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라르곤은 누구라도 붙잡고 묻고싶었다. 그 누구도 아닌 브랜든 자신이 흐린 빛이라도 낼 수 있게 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초대를 받아 그 세계의 조각을 볼 수 있게 된 라르곤은 무엇을 해야 할까. 부재함으로 그 지옥을 만드는 데에 일조한 라르곤은, 무엇을 해야 할까. 함께 무저갱으로 뛰어들 수도 없는 나는, 곁에서 기다려주는 걸 빼면 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때에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배운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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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후 두 번째 책장에서 마지막으로 손이 닿은 곳은 제일 위 줄의 가장 오른쪽 칸, 벽돌에 더 가까워 보일 정도로 두꺼운 책(마도공학과 생물학이 결합된 논문집이었다)이 있는 곳이었다. 마지막 몇 권까지 꺼내 내려두면 사이에 끼인 무엇인가가 톡, 떨어진다. 괜한 호기심에 들어 살펴 보면 함께 있던 구석 자리의 책들과 달리 유난히 매끈한 종이 편지 봉투였다.
이상하다, 무슨 보존 마법이라도 걸어 뒀나봐. 중요한 건가. 무거운 양장본들 사이에 짓눌리듯 끼어 있었던 탓에 본래의 모습보다 납작해졌을 그것을 뒤집으면, 뻑뻑해진 눈에 이제는 아플 정도로 익숙해진 필체로 정갈하게 쓰인 글자들이 눈에 박힌다.
-라르곤에게.
어, 하고 짧게 내뱉은 소리에 무슨 의미가 들어 있었는지는 라르곤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 소리에 이쪽을 바라본 브랜든 카스는, 그 짧은 순간 그 봉투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건 열지 마라, 라르곤.”
“…왜?”
“그것만은 읽어봤자 좋을 것 없다. 오래된 것이니 그냥 바닥에 둬.”
“원하는 만큼 읽어도 좋다며.”
“…읽고 싶나?”
“알고 싶어.”
억지에 가까운 요청을 마지못해 승낙하며, 브랜든은 쓰게 미소 짓는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도록 해.”
에두른 허가에 봉투를 열면 수수한 편지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브랜든은 이내 새로운 서류철을 끌어당겨 읽기 시작했지만, 그의 펜은 어째서인지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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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그날의 꿈을 꾼다.
이 ‘여전히’는 언제까지 이어졌을까. 어쩌면 지금도 그는, 여전할까. 바닥에 쌓인 수많은 과거를 눈에 담는다. 그리고 읽었던 모든 기록을 다시금 떠올린다. 지금 이 편지를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자문에는 부정적인 자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눈이 편지지에서 떨어지지 않아서, 아주 오래 묵은 문장들이 제멋대로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이해보다 빠르게 새겨지는 단어들이, 지독하게 일렁였다.
“아직도, 네 세상이 온통 나야?”
답은 약간의 침묵 후에 돌아온다.
“앞으로도 제법 오랫동안 그렇겠지.”
-나는 네가 사랑한 것들을 모두 사랑할 수는 없어. 하지만 지킬 수는 있겠지.
“이게, 브랜든. 이건….”
“몇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때는…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너무 신경쓰지는 마라.”
오랜 시간을 건너 닿은 그 단어들이, 글자들이, 글씨가 담은 마음이, 그 대답마저도,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 무게가 종잇장에 덧씌워져서, 라르곤은 편지를 떨어트리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나자.
그 문장들의 가장 아래에 가늠할 수도 없이 깊고 무거운 누군가의 마음이 있었다. 발아래 얄팍하게 쌓였던 무지가 사라진 지금에 와서야, 라르곤은 그 중력에 이끌리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멀미를 닮은 메스꺼운 감각이 명치께로부터 새어나온다. 잠시 그대로 섰던 라르곤은 하얘질 정도로 힘을 주고 있던 손끝을 억지로 움직여 다시 편지지를 접는다. 편지를 다시 봉투에 조심스레 넣는다. 브랜든에게로 다가간다.
자각, 자각, 덜 깨진 유리를 밟는 소리가 울리면, 그제야 브랜든은 선잠에서 깬 학생처럼 다시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한다. 책상 앞에 다다른 라르곤이 내려다보면 눈에 띄게 흐트러진 글씨가 막 두어 단어 생겨난 참이었다. 잉크가 덜 마른 글자들의 바로 옆에 편지를 내려놓으면, 펜 끝이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멈춘다.
“언젠가, 괜찮아졌다고 느껴지는 날이 오면 돌려줘. 그 때가 되면, 직접 읽어 줘.”
검은 장갑으로 싸인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계속 네 곁에서 어떻게든 더 나아질 너의 세상을 지켜보다가, 결국은 사랑하게 될 테니까.”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펜을 쥔 손을 덮듯이 살짝 손을 겹쳐 잡으면, 작은 손은 여전히 그 옛날의 여느 날과 똑같이 차가웠다.
“그러니까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해줘야 해. 이제는 재앙도 없고, 시간은 많잖아, 그치? …다시 만났으니까.”
라르곤이 작게 웃으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는 브랜든 카스가 있었다.
푹 젖은 붉은 눈동자에서 일렁이던 어떠한 것은 라르곤에게도 아주 읽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는데 - 어쩌면 이게 사랑일지도 몰라.
라르곤은 결과적으로 올바른 추론에 성공해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