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르곤은 흐릿한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잠이 달아나도록 우아아아아, 일부러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모르는 누군가가 들으면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을 기상창은 잠에서 깨기 위한 라르곤의 오랜 버릇이었다. 라르곤은 원래도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일렀다. 왕진을 나가기 전에 깊은 산속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침대에서 일어난 라르곤은 시트를 적당히 매만져 놓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집안은 딱히 공간 분리가 되어 있지 않아 부엌은 침대에서 고작 열두어 걸음 거리였다. 조리대 위의 천을 걷어내자 어젯밤 만들어 둔 손바닥만 한 빵반죽들이 동글동글하게 부푼 얼굴을 내밀었다. 응, 나쁘지 않아. 라르곤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번진다.
반죽을 화덕에 넣고 돌아서서 라르곤은 부산히 움직였다. 어제 길어 둔 물을 덜어 세수를 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널어놓은 수건과 행주들을 걷어 개었다. 그러는 사이 화덕에서는 점점 고소한 냄새가 풍겨 나와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러다 갑자기 상대가 무화과를 좋아할지 아닐지 모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이런, 아무것도 넣지 않은 빵도 몇 개 만들걸 그랬네.
아무튼 다 구워져 나온 빵도 썩 성에 차는 퀄리티였다. 빵이라면 수백 번도 더 구워봤지만 그래도 가끔은 실패할 때가 있단 걸 생각하면, 남에게 줄 빵이 제대로 만들어진 것은 행운이다.
그 사이 집안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해가 꽤 떠올랐다는 뜻이었다. 라르곤은 서둘러 허리께 가방에 약과 진료도구를 챙기고, 작은 소풍 바구니에 아직 따뜻하다 못해 뜨끈한 무화과 빵을 담았다. 낡은 문이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리자 정령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풀거리며 다가왔다.
"라르곤, 라르곤!"
"안녕, 좋은 아침이야."
"소풍 가, 소풍 가?"
"아, 이거?"
라르곤은 바구니를 들어올리며 웃었다.
"어제 그 애한테 가져다주려고. 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을 거 아냐. 많이 배고플 거야."
어제 오후. 깊은 산속, 슬픈 노랫소리를 따라 다다른 곳은 숨이 막히는 탁기와 암흑으로 가득한 공동이었다. 그 속에 그가 있었다. 어둠에 잠식당해 괴로워하면서도, 탁기에 지지 않는 묘한 위압감을 내뿜고 있던 존재. 그 위압감 때문에 상상도 못 했는데, 정작 (실례를 무릅쓰고 멱살을 잡아서) 끌어내고 보니 10대 중반을 넘어 보이지 않는 앳된 소년이었다.
무시무시한 검은 요정. 산에 오른 사람들을 광증에 빠뜨리는 그 존재는 그렇게 불렸다. 눈에 익지 않은 복식에 어린 소년이라는 외모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소문을 뒷받침할 근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르곤에게는 전혀 무시무시하거나 기분 나쁜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산속의 어둠에 갇혀 있던 아이라니,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인간에게 적대적인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막 끌려나왔을 때의 당혹한 얼굴을 보고 라르곤은 직감했다.
그리고 어떤 사연이 있었든 갈 곳 없는 자를 그대로 두지는 못하는 것이 라르곤의 성미였다. 하지만 소년은 같이 가자는 라르곤의 말을 한사코 거절했다. 아니, 애초에 말을 잘 섞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해가 넘어갈 때가 되어 라르곤이 초조해하자 어서 혼자 가라고 한 것이 가장 긴 말이었을 정도다. 와. 나도 할아버지랑 살 때 한 고집 한다는 소리를 듣곤 했는데. 나보다 더하네.
회상에 잠겨 있는데 정령이 말했다.
"걔 별로, 걔 별로."
"왜?"
"재수없어, 재수없어."
노골적인 표현에 하마터면 폭소를 터뜨릴 뻔한 라르곤은 정령을 달래듯이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 그런 무서운 곳에 갇혀 있었는걸. 나라도 기분 안 좋아서 그런 태도였을 거야."
말투뿐 아니라, 표정도 그랬다. 본디 부드럽고 귀여운 인상이지 않을까 싶은 얼굴이 시종 찌푸려져 있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던 터다.
"이름도 아직 못 들었지. 오늘은 꼭 이름도 듣고 집에도 데려올 거야!"
라르곤의 다짐 아닌 다짐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정령은 말없이 제자리를 빙빙 맴돌았다.
검은 요정, 혹은 소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수풀 너머를 쳐다보았다. 산속에 으레 들릴 법한 새소리, 작은 산짐승 소리조차 없는 고요한 장소에 수풀을 헤치는 소리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사람의 목소리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대강 짐작이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가장 가까운 수풀 뒤에서 예상대로 어제도 본 얼굴이 등장했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이런 곳에는 어울리지도 않게 활짝 웃으면서.
"안녕, 잘 잤어?"
그저 무시하면 되었을 일이다. 그런데 대답을 하고 만 것은 그 사람 좋은 표정 때문이었을까, 가당치도 않게 사람이 그리웠기 때문이었을까.
"…왜 또 왔지."
퉁명스러운 첫마디에도 라르곤은 아랑곳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바구니에서 부스럭거리며 빵 하나를 꺼내들 뿐이었다.
"어제부터… 아니 그보다 한참 전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지? 배고플까 해서, 빵을 가져왔어."
소년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난 식사가 필요 없는 몸이다. 허기 같은 것도 느끼지 않는다."
매몰찬 거절의 말에 민망해할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얼굴이 더 밝아졌다.
"어… 그래? 그럼 배는 안 고팠겠네. 다행이다. 그래도 못 먹는 건 아니지? 그럼 한번 먹어봐. 오는 길에 많이 식긴 했지만 막 구워온 거야."
나 꽤 자신 있다니까? 할아버지가 내 빵을 얼마나 좋아하셨는데. 끼어들 틈도 없이 말을 이어가며 라르곤은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와 빵을 들이밀었다. 소년의 미간 주름은 더 깊어졌다. 애초에 첫 인사에 대꾸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진 건 소년 쪽이었다. 소년은 다 들리라는 듯 깊은 한숨을 쉬고서, 장갑을 벗었다. 햇빛을 본 일이나 있었을까 싶을 만큼 창백하게 흰 손이 대조적으로 억센 손으로부터 빵을 받아들었다. 기대에 찬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소년은 빵을 노려보다가, 한 입 베어물었다. 겉에서는 보이지 않던 과일 비슷한 것이 씹혔다. 곧 머리에는 무화과라는 이름이 스쳤다. 무화과의 맛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생경했다. 무언가를 먹어본 지가 까마득하게 오래건만.
시선은 아직도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다. 소년은 감상을 말해주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나쁘지 않군."
적당히 한 말에도 라르곤은 더없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알기 쉬운 자로군, 감탄인지 빈정거림인지 모를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는 잠깐 허공을 보더니 말했다.
"아냐,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가 이곳까지 오는 중에 낸 목소리도 혼잣말이라기보다는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보통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무언가가 보이는 것이렷다. 말없이 바라보자 그는 변명하듯 말한다.
"아, 방금은 너한테 한 말이 아니구, 정령한테 한 말이야. 나한텐 정령이 보이거든. 정령이란 게 말이지―"
"굳이 설명할 필요 없다. 대충 짐작이 가니까."
"정말?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던데."
이런 곳에 갇혀 있던 자가 보통 사람일 거라 생각하는 게 어이없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소년과 라르곤 사이엔 한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령들만이 떠들고 있는지 라르곤이 간간이 허공에 대꾸했다. 더 먹을 생각이 없는 빵을 손안에 굴리며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라르곤은 다시 대화의 화살을 소년에게 돌렸다.
"있지, 이름이 뭐야?"
"…그게 왜 궁금하지?"
"응? 그야, 사람을 사귀려면 이름부터 알아야 하잖아. 아, 내 이름은 어제 말해줬는데 기억나? 라르곤이야."
"그러니까, 정체도 모를 사람을 왜 사귀려 하냐는 소리다."
"음, 사귀기 전에는 정체를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나?"
…말장난. 소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소년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라르곤은 이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네 입장에선 나도 정체 모를 사람이겠네? 내 소개부터 제대로 해야 했는데. 내 정신 좀 봐."
그런 정신을 챙길 여유가 있다면 이 상황의 부조리함을 알아볼 순 없겠나. 어쩐지 계속 속으로 딴지를 걸게 되는 상대다.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니 소년은 입을 꼭 다물기로 한다. 그러는 사이 라르곤은 멋대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나는 라르곤 에스테리아야. 이 아래 마을에서 치유사 일을 하고 있고, 어릴 때부터 정령이랑 얘기할 수 있어. 특기는 약초 찾기랑, 약 만들기? 치유사니까 당연한가? 헤헤."
"……."
"내 약은 쓰다는 소리 많이 듣지만, 약은 원래 그런 거잖아? 음, 그리고 양파 수프랑 무화과 빵을 좋아하고, 만드는 데도 자신 있는 편이야. 언제 한번 양파 수프도 대접해줄게."
멋대로 약속까지 잡아놓은 뒤, 라르곤은 웃으면서 소년을 바라보았다.
"너에 대해서도 알려줄래?"
미소 너머로 진심이 전해져온다. 산의 어둠 깊은 곳에 붙박여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를 두려움 섞인 흥미 본위로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상대를 알고 싶다고, 저를 구해낸 자에게 감사조차 하지 않는 상대에게 순수한 호의를 가지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껄끄러웠다. 소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지금에 와서 할 이야기에는 어둠밖에는 없으니까. 스스로 입에 담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저 호의가 근심과 연민으로 바뀌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게 상대를 생각해서인지, 나쁜 사람이 되기 싫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라르곤은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은 눈을 내리깔았다. 점점 어지러워지는 마음에 조금 심술이 났다. 그래, 차라리 성가신 호의를 떨쳐낼 수 있다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열지 않는 쪽이 나을 상자를 연 건 다름 아닌 너다.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래전, 한 왕국이 있었다.
작지만 나름대로 번성하던 왕국에 어느 날, 강대한 적이 침입해왔고…. 왕은 백성들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금기를 범하면서까지 전설로 내려오던 수호의 힘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그 결단이야말로 적의 기만을 완성하는 행위였으니.
수호의 힘은커녕, 저주만을 얻은 왕은 스스로 백성들의 목숨을 앗아 망령으로 만들고 나라를 파멸시켰다."
천천히, 힘주어서, 그가 궁금해하는 것을 입에 담았다.
"브란두흐 카디아라크. 그게 왕의 이름이다."
말을 마치자 기이할 정도의 고요가 찾아왔다. 살아 있는 것들의 소리도,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조차 없었다. 일부러 라르곤을 보지 않고 이야기를 마친 소년은 다만 기다렸다. 두려워하며 되돌아가려고 하고 있을까? 가볍게 건넨 안부 인사에 심각한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까?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고마워. 어려운 얘기였을 텐데… 말해줘서."
거기까지는 짐작 가능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런데 또 다른 것도 알고 싶다. 좋아하는 거라든가. 싫어하는 것, 괜찮은 것, 불편한 것도…."
기가 막힌 소년은 라르곤을 쳐다보았다. 약간 처진 눈썹은 쉽지 않은 이야기를 하게 만들었다는 미안함의 발로인지, 그럼에도 기어이 선을 넘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인지.
소년은 쏘아붙였다.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하다고 하면 어쩔 거지?"
"어…."
"……."
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말했다.
"…미안. 그래도 이건 포기 못 하겠네.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는 내가 짐작할 수도 없지만, 오랫동안 혼자 슬퍼했다는 건 알겠어. 그런 사람을… 계속 혼자 두고 싶지 않아. 같이 얘기하고, 같이 있고 싶어.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아파했으면 좋겠어."
이 자는 남의 아픔을 두고 볼 수 없는 성정이기에 치유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가끔 있지. 이렇게 남의 아픔을 제 것인 양 받아들이는 사람이. 오래된 기억 속에서 떠오르려는 누군가의 이름을 지워버리며 소년은 대꾸했다.
"난 덜 아프기를 바라지도 않으니, 너도 신경 끄는 게 좋을 거다. 이건 내 잘못에 대한 대가니까."
소년 본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생각이고 말이었지만, 그 말은 라르곤 안의 무언가를 건드린 듯했다. 어떤 박정한 말을 들어도 시종 온화했던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 자기 의지도 아니었던 일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건… 그건… 너무 가혹해."
이번만큼은 소년도 지지 않았다.
"넌 실수로 남을 다치게 했다면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건가?"
"그런 뜻이 아니야! 아픔에, 괴로움에 빠져 있는 걸 사죄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거야.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살아 있는데, 살아 있다면… 사죄 이상의 고통까지 짊어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래. 죽지도 못하고 살아남았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죽지 못하고 망령이 된 이들이 지금도, 내 옆에 있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면서."
소년은 실소를 흘렸다. 어쩌면 애초에 이야기를 너무 담담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이렇게 구체적으로 귀를 막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면. 이제야 충격을 받은 듯 눈에 띄게 낯빛이 어두워진 라르곤을 보며 소년은 드디어 그를 떨쳐낼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두고, 산 나는 너와 웃고 떠들기라도 하라는 말인가?"
라르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 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그러나 서로 시선은 비껴둔 채 한참 말없이 서 있었다.
"…알았어. 더이상 강요하진 않을게."
이윽고 라르곤이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소년은 라르곤을 쳐다보았으나 그의 시선은 조금 전에 내려둔 바구니를 향해 있었다.
"빵은 두고 갈게, 배고프면 먹어."
배고플 일이 없다고 굳이 다시 한 번 말하지는 않았다. 그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라르곤은 뒤돌아섰다.
"또 보자."
대답은 없었다.
"라르곤, 울어, 울어?"
라르곤은 올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말소리가 저쪽에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무렵, 말없이 눈가를 훔치는 라르곤을 본 정령이 물었다.
"나쁜 요정, 나쁜 요정!"
"아냐, 나쁜 건 나야."
잠시 멈춰 선 라르곤은 손등으로 한쪽 눈을 가렸다가, 흥분에서 외치는 정령에게 고백하듯 말했다.
"난… 내가 듣고 싶던 말을 저 애한테 밀어붙인 것뿐이야."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어릴 때부터 괴물이라며 손가락질받는 것도, 전부. 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늘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다. 그래서 소년에게도 그렇게 얘기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와 다른 사람이었다. 나 같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픔과 외로움을 안고도 묵묵히 감내하는 모습을 보자 수치스러움에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 도망쳐왔다.
그래도 스스로를 고통 속에 놔두는 것이 사죄가 아니라는 확신만은 그대로였다. 같이 있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동정인지, 친절인지, 자기연민에 가까운 무언가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러니까,
"…또 보자."
들을 상대 없는 인사를 중얼거리고는 라르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소년이 브랜든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은 며칠 후의 일이다.